철학하는 공학자, 수학하는 시인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90퍼센트 가까이는 공학하시는 분들이고 또 조선해양산업에 종사하는 분이실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업을 벤치마킹하고 기술도입을 할 때 기조가 된 기술의 핵심은 용접, 블록단위 설계와 흐름생산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 건조국으로 도약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해양플랜트를 건조하면서 체득한 임기응변, 창조적 변형 능력과 선주의 요구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에 있다.
표준선 정책으로 변환한 일본은 핵심설계 인력의 공백이 이어졌고 여전히 내수를 바탕으로 재건을 꾀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과는 격차가 크다.
필자는 조선해양산업에 종사하는 30여 년 동안 1997년 국가부도 직전까지 갔던 IMF 경제위기, 2007년의 세계금융위기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조선해양산업 만큼은 역으로 호황기를 보내 전체 직장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자연에는 사계가 있듯이 산업에도 흥망성쇠가 있다. 10년 주기 경기순환주기가 그동안 업계 정설이었지만 30년 호황을 누린 끝에 찾아온 2014년 해양플랜트 위기는 혹독했다. 원인도 자명했고 처방도 확실했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현재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해양분야 전문가 26인의 필진으로 구성된‘해양플랜트, 내일을 향해 다시 일어서다’는 책을 기획하였다. 모자라는 것은 모자라는 대로 넘치는 것은 넘치는 대로 그 장점과 약점을 버무려 바닥을 탄탄히 다지는 일이 중요하다 싶었다.
이 일의 시초는 2008년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발행한 <조선해양공학 용어해설>이란 책이다. 2004년을 전후로 상선과 해양, 특수선의 조직통합 분위기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10년 정도 메모해 두었던 원고를 책으로 엮었다. 그리고 영어와 일본어로 통용되던 용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시도했다. 기리빠시(잔재), 돌관작업(긴급작업) 등의 일본어 잔재는 털어버리고 영어로 번역되지 못하고 있던 사상(grinding), 마킹(Marking), 선행부착(fit-up) 등을 정리하였다.
▶ (왼쪽부터) 해양플랜트, 희망을 향해 다시 일어서다(2016)|조선해양공학 용어해설(2008)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기술발전 속도를 반영한 체계적 대응, 조선공학과 해양공학의 통합에 대한 단초 제공, 다른 관련 산업 분야와의 연계 시도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2010년에 개정판을 발행하였다.
이후 2011년 <한·영·러 조선해양공학 용어사전>을 책임 편집하였다. 7,000여개의 전문용어를 3개국 언어로 일치시키는 작업이었는데 무리라는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6개월의 작업 끝에 완료하였다.
언어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자국민뿐만이 아니라 수출산업이자 바다를 통해 열린 교류가 필수인 조선해양산업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한·영·러 조선해양공학 용어사전>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한·영·러·중 조선해양공학 용어사전>으로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다.
▶ 한·영·러 조선해양공학 용어사전(2011)
언어를 지배하는 자가 산업을 지배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의 말을 빼앗은 이유도 영어가 만국공통어로 기능함으로써 영어권 국가들이 얻는 부가이익을 상상하면 어렵지 않게 짐작될 것이다. 조선해양용어만큼은 우리가 주도하고 싶다.
올해 초 A.C.의 C가 Century가 아닌 코비드 19라는 암울한 역병의 시대를 이기기 위해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김인현 교수님이 주관하셔서 매주 토요일 저녁 줌을 통한 화상세미나가 개최되었다. 매주 새로운 주제로 조선, 해운, 물류, 금융, 법률, 문학, 레저 등 해양산업 전반에 대해 열띤 논의가 온라인을 타고 오프라인에서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통섭을 논하고 새로운 창발적 의견을 제시하였다.
곧 <해양산업 전문가 20인의 통찰(가제)>이라는 책이 서점을 통해 선을 보일 것이다. 이 작업의 의미는 조선해양산업을 기준으로 하면 해운이나 물류와 같은 전방산업과 금융, 기자재, 엔지니어링 등 후방산업이 한 자리에 모여 큰 시각에서 국가의 대계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 참여하는 20여명의 저자들과 청중으로 참여했던 분들은 한결같이 ‘통섭’의 중요성을 이야기 한다. 어느 한 분야에 매몰된 편협한 시각은 왜곡된 정책으로 이어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하고 국가경제의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험론적으로 회고한다.
‘기자재는 오십년, 엔지니어링과 금융은 국가의 백년지대계’라는 말은 영국을 통해 생생히 증명되고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1950년대 후반 선박 건조산업을 서유럽과 일본에 넘겨주었지만 아직도 금융과 보험, 엔지니어링과 선급, 기자재 산업은 굳건하게 건재하고 있다. 영국이 관광산업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현실의 겉만 본 평가이다.
우리나라도 중국이 저임금을 무기로 추격해 오고 있다고 엄살 내지는 호들갑을 떨 일이 아니라 전문관리 생산성 향상, 기술 차별화 등을 통해 공격적 시장 선점에 나서야 한다.
▶ 엔지니어링 표준단가표
▶ 한·중·일 조선산업 경쟁력 상대 비교
현장 노동자의 인건비 경쟁력을 비교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하청에 재하청을 거쳐 철판에 용접을 하는 근로자는 외국인 노동자와 동일한 최저시급을 받는다. 싫지만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전문가에 대한 대우의 경우 우리나라는 특급기술자가 공식적으로 40만원/일을 조금 넘지만 우리가 외국의 특급엔지니어를 고용할 경우 하루가 아닌 시간당 급료를 최소 그 2배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도 풀어야 하는 숙제다.
조선해양산업계는 현재 정부와 함께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모론’과 같이 터무니없는 주장들도 있지만 세월호의 사고원인은 과학적으로 밝혀졌고 대책도 간단명료하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재발방지를 위해 입법화를 해야 하는데 대통령도, 국회도, 전문가들도 함구하고 있다.
세월호 해법은 두 가지이다. 선령 25년 이상 선박의 국내 조건부 취항과 선박평형수를 고정발라스트로 전환을 금지하는 법안을 입안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담아 <공학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이라는 책을 쓰고 싶다는 버킷리스트를 포기하고 <그대, 바다에 가시거들랑>이라는 시와 에세이집을 최근 출판하였다. 30여년 조선해양산업계에서 일하면서 느낀 생각들과 세월호에 대한 반성을 문학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 시와에세이집 ‘그대, 바다에 가시거들랑’(2021)
‘문’과 ‘이’가 본래 하나였으나 산업혁명 이후 현대 사회는 이 둘을 상반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학교교육은 더욱 더 문과와 이과를 구별 또는 차별하였으며, 기업은 생산효율성 관점에서 분업을 당연한 것을 넘어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사물이 철학을 가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문과 이가 하나가 되는 통섭의 장으로 환원해야 한다. 이것은 시대의 명령이자 자연의 섭리라고 생각한다.
시 쓰는 엔지니어, 수학과 과학을 공부하는 시인이 일상인 사회가 너무 빡빡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앞으로 대세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글쓰기와 말하기 능력의 중요성은 ICT와 IoT, AI의 놀랄만한 속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욱 중요해 질 것이다.
일예로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도심 집중이 완화될 것이라는 견해는 폐기되었다. 대면 소통의 품질이 비즈니스를 좌우하니 당연 도심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코비드 19가 문화를 일거에 바꾸어 버린 이 시절 우리 조선해양산업 종사자들이 회귀 또는 포용해야 할 것은 통섭과 인문학이다.
진해그린스마트산단(주) | 이수호 박사
– 부경대학교 해양공학 박사
– 진해그린스마트산단(주) 기술경영본부장
– 관심분야 : 해양플랜트, 기자재, 특허
– E-mail : shlee@disyar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