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의 세계
“더 하려야 더 할 게 없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하는 최선.”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는 자본금’이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한 분야에서 내가 성공한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나는 신념의 바탕 위에 최선을 다한 노력을 쏟아 부으며 이 ‘평등하게 주어진 자본금’을 열심히 잘 활용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1998년 두차례에 걸쳐 총 1,001마리의 소떼를 실은 트럭을 앞세우고 판문점을 넘었던 정주영 회장님의 신조라고 합니다.
나는 현대맨도 아닐뿐더러 정치판에 들어섰던 그분의 이미지가 모두 긍정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분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_나의 살아온 이야기>는 가슴 뭉클하고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합니다.
책 속의 이야기는 70년대 전후로 내가 산업현장에 직접 들어서기 전이 대부분입니다.
부지 매입도, 설계 기술도, 조선소 건설자금도 없는 상태에서 당시 세계 최대 크기인 26만톤 유조선 2척을 수주받았고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전설입니다.
그러나 내가 현장 속에서 몸으로 느끼고 확인했던 영국과 미국, 일본, 우리나라, 동남아, 중국으로 이어지는 조선소 역사의 굴곡에 대해 책을 읽으면서 복기가 되고 공감이 되는 터라 가슴이 울컥해지는 것을 몇 번이나 느꼈습니다.
조선해양 관련 기업이나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 양념으로 섞어 들려주는 유머입니다.
만약에 강의실에 갑자기 뱀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 H사 직원들은 보는 즉시 워커발로 밟는다.
– D사 직원들은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모두 회의실로 들어간다.
– S사 직원들은 우선 윗선에 보고한다.
뜬금포로 한국인과 세계의 FM이라는 독일인을 비교하면 일반화의 오류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인 특히 구서독 사람들은 근면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칭찬을 세계인들로부터 듣습니다. 끔찍한 나치학살이나 1차, 2차 세계대전의 주동자라는 부정적 인식은 거의 소거되었습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슬픔 짐승>은 ‘모니카 마론’이라는 독일 여성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통일독일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탄생시킨 작품인데 형식은 남녀 사이의 불륜을 모티브로 하고 있습니다.
남자주인공인 프란츠(서독을 은유)는 단정하지만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된 예를 들면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만듭니다. 매일 밤 새벽이 가까워오면 여자를 떠나는 남자를 끝까지 순정을 다해 잡으려는 화자인 여자주인공(동독을 은유)의 태도는 답답하다 못해 억지로라도 뜯어 말리고 싶습니다.
일과 개인사는 분리된다고 말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진심’ 또는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소용돌이를 많이 겪었던 독일인들은 자기방어기제가 들어나지는 않지만 내면에 체화되어 있고 심지어 교육을 받는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남자는 휴가철이 되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아닌 혼자서 자신을 만나러 혼자만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일상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외롭다는 뜻이리라.
지나칠 정도로 규범화되어 있는 논리와 합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감성을 억누르는 모순이 생기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보지 않았기에 뭐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의 현실은 아노미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누가복음 5:36~39)’란 구절을 결론으로 인용해 봅니다,
밀레니엄을 넘어선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니 기업과 사회 그리고 개인 모두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필요로 합니다. 앞서 유머에서 소개한 기업 고유문화가 옅어진 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한국조선해양㈜’도 옛 방식과 다른 토양에서 홀로서기에 나서야 할 것이고 빅3 및 13개 대형조선소와 82개 중소형 조선소의 중장기 로드맵을 그리는 문제도 산술적으로 쉽게 도식화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도 해야할 일이고 세월이 지나고 세상이 변한다 해도 ‘혁명적 사고의 전환’과 ‘지극정성’을 넘어서는 처방전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일에 있어서 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해양공학’이란 당시에는 뜬금없고 낯선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다는 꿈은 순진한 기대란 걸 대입원서 써 들고 부산역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험이 지금까지 내 살아가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선배, 후배 그리고 동료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인정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일욕심이 커서, 그리고 불합리한 결정에 타협하기를 싫어하다보니 한편으로는 담을 쌓은 인연도 몇 있었습니다. 지금이야 기다렸다가 가는 여유도 배우고, 같이 가는 동행의 소중함도 알아가는 중입니다.
내가 현역을 떠날 때쯤 어떤 이야기를 남길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영광된 자리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고 다만 후회하지 않는 지극정성을 다하는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서_나의 살아온 이야기”
– 정주영(1915.11.25.~2001.03.21.)
– 솔출판사
– 1판 1쇄 1998년 3월 10일, 1판 중세 2011년 5월 16일
“슬픈 짐승(Animal triste)”
– 모니카 마론(1941~ ) 지음 · 김미선 옮김
– 문학동네
– 1판 1쇄 2010년 3월 15일
/ 이수호(ISO TC8_조선 국제표준 전문위원, 해양공학박사)